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예수님을 믿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성경을 잘 모르시는 분들이 헷갈리는 것이 있습니다. 다름 아닌 ‘요한’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이 성경에 많이 나오는데, 이걸 헷갈립니다. 그래서 일단 오늘의 주제를 전하기 전에 성경의 중요한 인물인 요한에 대해 간단히 알려드리고 출발하겠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요한‘이란 이름을 가진 대표적 인물 세 사람이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의 12 제자 중의 한 사람인 ’사도 요한‘입니다. 둘째, ’마가복음’을 쓴 저자인 ‘마가’가 있습니다. 그의 풀네임은 ’마가 요한‘입니다. 셋째, 오늘 본문에 언급된 ’세례 요한’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나서 예수님을 증거하고 예수님에게 물세례를 베푼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례 요한에 대해 이런 최고의 칭찬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마11:11)
성경에 대해 좀 아시는 분들은 이 말씀을 들으면 좀 의아하게 생각이 들지도 모릅니다. “뭐야? 그러면 세례 요한이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보다, 위대한 선지자인 모세나 엘리야보다, 또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인 다윗보다 큰 사람이야? 이거 뭔가 이상한데? 왜 그러지? 그 이유가 뭐야?”
여러분, 왜 세례 요한이 가장 큰 자일까요? 세례 요한이 구약 시대의 그 어떤 사람보다 인격이 훌륭하거나 믿음이 더 좋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구약의 모든 선지자는 메시아가 오실 것을 ‘멀리서’ 예언했지만, 세례 요한은 직접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 눈앞에서 보고 예언했기에 그를 가장 크다고 한 겁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잘못 해석하는 것 중에 대표적으로 이런 것이 있습니다. “신약의 사람들은 구약의 사람들보다 크다.” 과연 그럴까요? 한 번 물어봅시다. 구약의 인물 중에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있습니다. 그리고 홍해를 가르고 하나님과 대면한 모세도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너는 내게 합한 사람이다”라고 인정한 다윗도 있습니다.
그런데 신약 시대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그 옆에 달렸다가 간신히 구원을 받은 오른편 강도가 있습니다. 이 강도가 과연 아브라함보다 모세보다 다윗보다 큰 사람일까요? 그리고 예수님을 믿었지만 늘 세상적으로 방탕하게 지냈던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간신히 천국에 갔는데, 그 사람이 천국에서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다윗을 만나서 “나는 신약의 사람이고 당신들은 구약의 사람이니 내가 당신들보다 크다.”라고 뽐내고 자랑할 수 있습니까?
상식적으로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건 너무나 아전인수격이고 너무나 교만한 말입니다. 만약 이런 일이 천국에서 일어난다면 천국은 질서가 깨지고 어수선해집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종종 이런 식으로 착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동안 여러 성경의 주석들이 그렇게 해석했기 때문입니다.
그중에 이런 해석이 있습니다. “신약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신부’이지만, 구약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신부가 아니라 단지 예수님의 ‘친구’일 뿐이다. 그러니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신약의 신부가 예수님과 친구인 구약의 그 어떤 사람들보다 크다.” 어때요? 교회 오래 다니신 분들은 이런 해석을 들어보셨지요? 저도 이런 해석을 자주 들었습니다.
그런데 결론은 아닙니다. 천국에서는 아브라함과 다윗을 포함한 모든 구약의 성도들도 결국 ‘신부(교회)’의 한 지체로 완성됩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천국에는 ‘24 보좌’가 나옵니다. 이는 구약의 12지파와 신약의 12사도를 상징하며, 결국 구약과 신약의 모든 성도가 하나님 나라에서 동일한 영광의 보좌에 앉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천국에 올라가면 최종적으로 구약의 사람들이나 신약의 사람들이나 모두 예수님과 같은 ‘그리스도의 신부’라는 하나의 몸으로 부활하기 때문에 천국에서 누리는 예수님과의 친밀함에 차별이 없습니다. 그때는 누가 구약 사람인지, 누가 신약 사람인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똑같이 주님의 얼굴을 직접 보고, 똑같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영원히 거하게 됩니다.
결국 예수님의 본문 말씀은 “천국에서는 신약 시대의 사람들이 구약 시대의 사람들보다 크고 상전 노릇 할 거다.”라는 뜻이 아니라, “지금 신약 시대에 이 땅에서 사는 너희는 옛날 구약 시대에 이 땅에서 살았던 아브라함이나 모세가 부러워할 만큼 엄청난 은혜의 시대를 사는 축복받은 존재다.”라는 겁니다.
예- 맞습니다. 신약의 은혜 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구약의 율법 시대를 사는 사람들보다 확실히 복됩니다. 구약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아버지(아빠)’라고 친밀히 부르지 못했습니다. 단지 ‘주여’라고 불렀습니다. 즉 주인이신 하나님께 절대복종해야만 하는 주인과 종의 관계로 불렀습니다. 그러나 신약 시대의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을 ‘아버지(아빠)’라고 다정하게 부를 수 있습니다. 양자의 영이신 성령님이 우리 안에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천국에 올라가면 구약의 사람들과 신약의 사람들의 차이가 없습니다. 천국에는 구약 사람들만이 사는 옛날 동네가 따로 있고, 혹은 신약 사람들만이 사는 새 동네가 따로 구분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늘의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이 땅에서는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서 보았고 예언했기에 이전에 이 땅에서 활동한 그 어떤 선지자보다 큰 자인 것입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라도 세례 요한보다 크다는 것은 이 땅은 아직 미완성의 장소요, 천국은 구원이 완성되고 성취된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비유를 들어보겠습니다. 거친 바다 위에서 폭풍과 싸우는 ‘세계 최고의 항해사(지상의 세례 요한)’가 있습니다. 그는 위대하지만 여전히 배고픔과 의심, 죽음의 공포 속에 있습니다.
반면, 이미 육지에 상륙해서 아버지의 품에서 잠든 ‘어린아이(천국의 막내)’가 있습니다. 이 아이가 일등 항해사보다 항해 실력이 좋아서 ‘크다’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이미 상륙했다’라는 그 상태 하나만으로도, 바다 위에서 고통받는 일등 항해사보다 훨씬 더 복되고 안전한 차원에 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세례 요한은 그 영역에서 ‘전교 1등’ 같은 존재입니다. 인간으로서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수준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이 땅에서 전교 1등(요한)이라 할지라도, 저 높은 차원의 나라에 있는 가장 막내(지극히 작은 자)가 누리는 영광과 지혜와 생명력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즉 본문은 신약 성도가 구약의 아브라함보다 모세보다 대단하다는 뜻이 아니라, 천국이라는 장소가 지상의 그 어떤 위대함도 감히 범접할 수 없을 만큼 압도적인 영광의 차원임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도 결국 순교하여 천국에 갔습니다. 그러면 세례 요한은 큰 자입니까? 작은 자입니까? 그도 역시 모든 항해의 일정을 마치고 천국에 상륙했기에 그때에는 그도 천국에서 큰 자가 되고 복된 자가 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그러니까 이 땅에서 아무리 자기가 잘나고 가졌다고 해도 천국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큰 자라고 뻐기고 교만하게 살면 안 됩니다. 종종 하늘을 바라보며 “그래, 천국에는 모두가 다 나보다 큰 사람들뿐이구나. 나도 천국에 도달하기까지 계속 노력해야겠다.”라고 겸손하게 충성하며 사는 것이 올바른 크리스천의 자세입니다.
그러면 모두가 다 예수님을 믿고 천국에 올라가면 그 천국에서는 누가 큰 자일까요? 하루는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마18:1) 이 질문의 배경에는 제자들 사이의 미묘한 서열 다툼과 권력에 대한 욕심이 깔려 있었습니다. 그들은 천국을 이 땅의 세상적인 계급사회로 오해했고, 그곳에서 누가 더 높은 관직이나 영광을 차지할지에 관심을 두었습니다.
이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말로만 설명하지 않으시고, 한 어린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며 시각적인 교훈을 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마18:3-4)
여기서 ‘어린아이와 같다는 것은 어린 아이의 미숙함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전적으로 부모(하나님)를 의지하는 순전함과 겸손함을 의미합니다. 즉 천국은 단순히 ’누가 더 큰가‘를 따지는 곳이 아니라, 이런 어린아이의 마음을 가진 겸손한 자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고, 이런 겸손한 사람이 큰 자임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길에서 서로 누가 큰지 다투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완전히 뒤집는 원리를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막9:35)
또한 야고보와 요한이 높은 자리를 요구했을 때도 예수님께서는 같은 원리를 반복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막10:43-44)
세상의 기준으로는 더 많은 사람을 부리고 다스리는 사람을 큰 자라고 합니다. 그러나 천국은 더 많은 사람을 위해 자신을 낮추고 섬기는 사람이 큰 자입니다. 여기서 섬김은 단순히 예의 바른 행동이 아니라, 자신의 기득권을 내려놓고 타인의 유익을 위해 희생하며 헌신하는 ‘종의 마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가르침이 단순한 이론이 아님을 자신의 삶으로 직접 증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5) 이 말씀대로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은 가장 낮은 곳에 종으로 오셔서 백성들을 섬기시고,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끝내 목숨까지 내어주셨습니다.
결론을 맺겠습니다.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는 세상적으로 큰 자가 되고, 높은 자가 되는 것에 별 관심이 없습니다. 예수님처럼 그렇게 겸손히 섬기며 살다가 예수님이 계신 섬김의 장소인 천국에 도달하며, 또다시 그곳에서 그렇게 하나님과 이웃들을 섬기며 살기를 소원합니다. 이런 마음을 모두가 가지고 살면 여기가, 이 땅이 천국일 텐데...
하지만 어떡합니까? 이 세상은 자꾸 스스로 높아지려고 하고 섬김을 받으려고만 합니다. 그러나 세상이 아무리 그렇게 될지라도 크리스천인 저와 여러분은 끝까지, 죽을 때까지 예수님의 섬기는 마음을 가지며 살면 좋겠습니다. 아무쪼록 이곳 캐나다에서도 섬김을 통하여 천국을 가꾸며 보람되게 살다가, 저 영원한 행복의 나라에서 또다시 서로를 섬기는 귀한 만남이 이루어지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 하나님 아버지, 이제는 높아지고 낮아지는 것에 조금도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주님처럼 이 땅에서 겸손히 섬기며 살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그런 삶에서 오는 행복을 얻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섬김의 모범을 보이신 주님과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진정한 기쁨을 얻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