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겠지만 혹시 당신이 영화배우 주인공이라면 어떤 영화를 찍고 싶습니까? 코미디, 로맨틱, 액션 모험, 가족 영화, 종교 영화, 공포 영화, 공상과학, 판타지, 뮤지컬, 미스터리, 다큐멘터리... 등등 많은 장르가 있습니다. 혹시 이 자리에 영화배우를 한번쯤 해보신 분이 있습니까?
저의 경우 중대부고를 졸업했는데 제가 고3 때 대학 진학을 위해 담임선생님과 상담을 했습니다. 그때 담임선생님이 저에게 추천한 전공이 있습니다. 어느 과일까요? 다름 아닌 중앙대 연극영화과입니다. 저를 유심히 관찰하신 담임선생님이 저에게 “원효야, 너는 이쪽에 재능이 있는 것 같다. 이곳에 지원을 해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한편 미술 선생님은 저에게 중앙대 미술대학 회화과를 추천하셨습니다. 교내 포스터 전시회 때에 제가 정밀묘사 그림을 한 컷 그린 적이 있었는데 그걸 본 모든 선생님들과 학생들이 “와- 이거 뭐야? 사진하고 완전 똑같네.” 하며 놀라워했습니다. 이런 미술 재능을 알아채신 미술 선생님이 저를 미술대에 가라고 적극 추천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중학교 때 야구부도 하고, 달리기도 잘하고, 운동에 꽤 소질과 재미가 있어서 체육과를 가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제가 전공한 과는 그동안 제가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과였습니다. 어느 과였을까요? 예- 영문과입니다. 세상에- 저는 제가 영문과에 들어가리라곤 진짜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당시 하나님이 저를 영문과에 들여보내시려고 희한하게 역사하셨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하- 하나님이 나를 이곳 캐나다에 선교사로 보내시려고 영문과에 들어가게 하셨구나.” 하고 이해가 됩니다. 이거 간증하면 코미디처럼 재미있는데... 오늘의 설교 주제는 아닌 것 같아서 이 정도 하고 다시 본주제로 들어갑시다.
제가 연극영화과를 들어가느냐 마느냐를 생각할 당시 1970년대 한국 영화계에는 정윤희, 유지인, 장미희의 트로이카 시대였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유지인이 여자 주인공이 되어 찍은 영화 제목이 있습니다. 당시 이 영화는 그해의 최대 관객 동원 흥행 1위의 영화였습니다. 혹시 이 영화 제목 아시는 분이 있습니까? 예- ‘내가 버린 남자’입니다.
이 영화가 크게 흥행하자 정윤희, 장미희 씨도 ‘내가 버린 남자’ 시리즈 영화를 찍었습니다. 그리고 이들 영화 바로 전에 히트친 영화의 제목이 있었는데, 혹시 이 영화 제목도 아시는 분 있나요? 예- ‘내가 버린 여자’입니다. 하여간 이때에는 사람들의 대화가 툭-하면 ‘내가 버린 남자’ ‘내가 버린 여자’라는 말을 유행어로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이들 영화의 제목인 ‘내가 버린 남자’ ‘내가 버린 여자’라는 말을 들으면 과거에 내 자신의 인생도 떠올리게 됩니다. 어때요? 여러분, 혹시 인생을 살면서 ‘내가 버린 남자’ 혹은 ‘내가 버린 여자’가 있지는 않습니까? 혹은 누구에게 버림당한 아픈 추억이 있지는 않습니까? 대개 보면 자신이 남을 버린 것은 별로 기억이 안 나는데, 자신이 남에게 버림을 당한 상처는 꽤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쓰리고 아픈 추억이 오랜 세월 속에 거의 잊혀져서 그저 옛날의 추억 정도만 되면 괜찮은데, 이것이 깊은 상처나 트라우마로 자리 잡아 때로는 나의 마음과 정신과 육체에 안 좋은 영향을 끼치기도 합니다. 오늘은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누구나가 몇 번 쯤은 겪게 되는 버림당한 상처와 이에 대한 대처방안을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먼저 마이너한 경우를 살펴봅시다. 버림을 당해도 크게, 깊게, 세게, 심하게 버림을 당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 보다는 작게, 약하게 버림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애들의 경우 술래잡기를 합니다. 애들이 다 숨었습니다. 아무리 찾아도 애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애들아, 못 찾겠다. 꾀꼴 꾀꼴 나는야 술래... 이제 그만 나와.” 그런데 애들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뭐야 이거? 애들이 나만 놓고 어디론지 사라졌습니다. 나만 혼자 덩그러니 남았습니다. 엥- 울고 싶어! 어렸을 때 다들 이런 비슷한 경우를 한번쯤은 당해보았을 겁니다. 그 당시에는 이게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기분이었는데 지금은 어른이 되니까 어떤가요?
이거 생각하면 아직도 몹시 화가 나는 분이 있습니까? 에이, 설마- 아니겠지요? 혹은 그때 나를 버렸던 그 새끼들을 생각하면 아직도 몸서리가 쳐지고, 죽이고 싶은 생각이 들고 있지는 않겠지요? 이거 뭐 사이코패스 공포영화 주인공도 아니고... 즉 당시에는 꽤 크게 느껴졌던 버림당한 경험이 세월 속에서 추억으로 잊혀지는 겁니다.
얼마 전에 돌아가신 가수 송대관 씨의 노래가 있습니다. ‘세월이 약이겠지요.“ 그렇습니다. 꽤 큰 상처도 세월이 흘러가면 웬만큼 치료가 됩니다. 그런데 반면 어렸을 적에 버림당한 추억이 아주 오랫동안 상처로 남는 경우도 있습니다. 제가 오늘의 설교를 준비하면서 자료를 찾아보았더니 이런 제목이 나옵니다. ’부모에게 4번이나 버림받은 남자‘
이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해서 KBS 교양 프로그램에도 나오고, TV '썰바이벌‘에도 나오고, 만화로도 나왔는데, 그 만화를 통해 소개된 스토리는 이렇습니다. “저는 부모님에게 네 번이나 버려졌습니다. 제 나이 다섯 살 때, 아버지가 집을 나가시고 어머니와 단 둘이 생활을 할 때였어요. ’애야, 아이스크림 사줄 테니 나가자.‘
제 손에 아이스크림을 쥐어준 어머니는 저를 두고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버림받은 저는 보육원에서 자랐는데, 아버지가 10년 만에 절 찾아왔어요. ‘애야, 그때는 전처랑 이혼하면서... 그렇게 됐단다. 며칠간은 우리 집에 가서 자자.‘ 그 후로도 몇 번씩 아버지 집에 가서 자곤 했어요.
하지만 점점 찾아오는 횟수가 줄어들더라고요. 보육원에서 가출을 해 아버지 집으로 찾아갔죠. 아버지는 재혼하신 상태였고, 아줌마는 저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더라고요. ‘애야, 1년만 더 보육원에 있으면 자립 지원금이 나온다던데, 지금 나오면 한 푼도 못 받는 거 아니야?’
그때 문득 ‘아버지가 나를 찾아온 것은 돈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러던 어느 날 술에 취한 아버지가 충격적인 사실을 고백하셨어요. ‘애야, 사실 넌 내 친아들이 아니다. 너를 버린 전처도 네 친모가 아니고...’ 입양이 됐다는 진실을 알게 된 전 결국 혼자 생활하게 됐죠.
그 후 저를 버렸던 어머니가 찾아와 웬 종이 한 장을 내미시는 거예요. 파양신청서요? 그렇게 전 어머니의 ‘가족관계증명서’에서 말소가 되었습니다. 파양되고 법원에서 나오는 길에 이런 대화를 했습니다. ‘애야, 마지막인데 뭐 궁금한 거 있니?’ ‘저의 친엄마는 어디 계셔요?’ ‘네 친엄마는 그때 널 키울 상황이 안 됐어...’
‘산부인과병원의 한 청소부인 아줌마가 그 상황을 듣게 됐고, 그 아줌마는 난임인 동생 부부인 우리를 위해 널 데리고 왔단다. 그 난임 부부인 우리는 아이를 갖고 싶었고...’ 즉 친엄마가 저를 낳자마자 데려왔다고 해요. 아버지 말로는 어느 날 집에 와보니 제가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자- 여러분, 이런 경우 어렸을 적에 친엄마로부터 버림을 당하고 또 양부모로부터 버려졌으니 너무나 큰 상처가 되었을 겁니다. 그 후 이 아이는 이름을 바꾸고 새 출발을 하게 됩니다. 그 이름은 “이형우, 1994년 7월 15일생, 서울 성동구 성수동에 위치한 산부인과에서 태어나자마자 병원의 한 청소 직원에게 맡겨짐.”
(이분 사진 한번 보여주실래요.) 그 뒤에 이어진 스토리를 보니까 이렇습니다. “충분히 슬픈 삶이었습니다. 이젠 더 이상 상처받고 싶지 않습니다. 원망하는 마음은 없어요. 그저 저를 낳아주신 엄마 얼굴 보고 밥 한 끼 먹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 스토리에 달린 댓글들을 보니까 이렇습니다.
“애가 무슨 쓰다가 버리는 가전제품인 줄 아나?” “강아지도 저렇게 데려다 키우다가 버리면 욕먹는데 사람을... 에휴!” “진짜 인생 참 기구하다.” “얼굴까지 공개하면서 사연을 알리는 게 힘들었을 텐데...” “애들이 무슨 죄냐고?” “그래도 얼굴이 잘 생겨서 다행이다.” “저렇게 큰 슬픔과 고통을 당했는데 나쁜 길로 안 빠지고 잘 살고 있는 거 보면 진짜 좋은 사람 같은데...”
반면 자식이 늙고 힘없는 부모를 버린 이야기도 꽤 있습니다. 조용기 목사님이 예전에 이런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순복음 교회에서 운영하는 ‘엘림 복지회관’ 양로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당시 그곳 양로원에 들어오시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그들을 돌볼 수 있는 보호자나 자녀가 없는 아주 딱한 처지에 있는 분들에게만 한하여 입소가 가능하였습니다.
하루는 양로원에 들어온 한 할머니가 몹시 아파서 거의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양로원에서 그 할머니에게 보호자나 자녀분들의 연락처를 물었습니다. 그런데 할머니가 한사코 자기는 보호자도 자녀도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양로원에서 그 할머니 소지품을 보게 되었는데, 거기서 전화번호가 있는 메모를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거기로 전화를 거니까 전화를 받는 중년의 한 남성분이 이런 말을 합니다. “아- 그 할망구. 죽어도 절대로 내 주소나 연락처를 가르쳐주지 말라고 했는데.” 여러분, 그렇게 말한 사람이 누구일까요? 바로 그 할머니의 아들이었습니다. 할머니는 자기가 그렇게 아파서 죽을 지경이 되어도 자기를 버린 아들에게 폐가 될까봐 자녀에게 전화도 하지 않고, 그 누구에게도 전화번호를 가르쳐주지 않았던 겁니다.
나중에 양로원에서 그 아들을 조사해보니까 꽤 좋은 직장에도 다니고 충분히 늙으신 어머니를 돌보실 여력이 있는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분은 당시 여의도 순복음 교회의 안수집사님이었습니다. 그 사실을 안 조용기 목사님이 매우 화가 나서 말합니다. “아니- 세상에! 늙으신 자기 부모를 버리는 이런 녀석이 안수집사라니!”
여러분, 주일 아침 예배에 이런 안 좋은 이야기를 들으니 기분이 좀 그렇지요? 하지만 이게 저와 여러분들도 겪어야만 하는 인생의 스토리이니 뭐 어쩝니까? 그리고 이런 스토리를 듣고 보면서 여러분의 버림당한 아픔도 좀 위로받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성경에 보면 이렇게 버림당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오늘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마27:46) 여러분,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나 대신, 너 대신, 모든 인류를 대신하여 처절하게 버림을 당하셨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율법사들에게 버림을 당하여 사형언도를 받으셨습니다. 즉 종교체제로부터 버림을 당하셨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종교가 주도하는 사회이기 때문에 종교체제로 버림을 당한다는 것은 곧 사회로부터 완전한 격리를 의미했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버림을 당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은 당시의 가장 강력한 로마의 정치권력으로부터 버림을 당했습니다. 고로 이젠 갈 곳이 아무 데도 없습니다.
셋째,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는 제자들에게도 버림을 당했습니다. 그토록 돌보고 사랑했던 제자들이었지만 가룟 유다는 은 30냥에 예수님을 팔았고, 수제자인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하며 저주까지 하고, 모든 제자들이 다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 이런 나쁜 새끼들!
넷째,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고 환영했던 이스라엘 동족들로부터 버림을 당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하고 예수님을 열렬히 환영했던 그들이 갑자기 태도가 돌변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라.”고 외쳐 됐습니다.
다섯째, 예수님은 자신의 가족들인 동생들로부터도 버림을 당했습니다.
여섯째, 예수님은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로부터도 버림을 당했습니다.
타락하고 죄 많은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당하는 것은 그래도 이해할 수 있고 참을 수 있는데, 자신을 그토록 사랑하신 하나님 아버지에게마저 버림을 당하여 죽게 되자 예수님은 마음이 너무나 힘들고 괴로웠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처절히 버림당한 예수님의 그 고통과 아픔이 있었기에, 죄인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구원사역이 비로서 완성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마침내 건축자들이 쓸데없다고 버린 돌이었지만 결국 가장 중요한 모퉁이의 머릿돌이요 주춧돌이 되었습니다.(마21:42)
이에 대해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53:3)
결론입니다. 누구나 버림을 당하면 참 힘듭니다. 더구나 믿고 의지하고, 사랑하는 가까운 사람에게 버림을 당하면 더욱 힘이 듭니다. 이럴 때 우리는 우리 앞서 철저하게 버림을 당하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분으로부터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잊지 마십시오.
나도 한 때, 아니 종종 사람을 배신하고 버린 적이 있지는 않았습니까? 물론 버린 사람은 잘 기억이 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때로는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도 버리고, 나를 그토록 사랑하신 하나님도 필요 없다고 마치 쓸데없는 돌멩이처럼 버리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의 마음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심히 아팠지 않았습니까?
이제 우리는 또 다시 예수님을 버리면 안 됩니다. 그 분의 마음을 또다시 아프게 하면 안 됩니다. 그 분은 나를 구원하기 위해 기꺼이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당하셨습니다. 이제 나는 나를 위해 버림당하신 그 분을 내 마음속에 영원히 모셔야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제 나도 그 분을 위해 버림을 당하는 아픔이 있더라도 잘 참고 견뎌야 합니다. 그래서 영광의 부활의 날에 주님과 재회하시는 큰 기쁨과 행복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 하나님 아버지, 이러면 안 되는데... 이 세상 많은 사람들이 서로를 버리는 슬픔과 고통 속에 살아갑니다. 오늘 이 자리에도 버림당한 아픔과 슬픔이 있어 심히 고통 하는 당신의 자녀들도 있습니다. 우리들이 버림당하는 아픔을 아시는 주님, 당신의 자녀들을 넉넉히 위로해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